탑의 이해
탑의 의미와 명칭 유래
탑(塔)이란 부처의 사리를 모셔놓고 예배하는 대상물이다. 탑이란 말은 고대 인도에서 무덤을 이르는 말인 '스투파(stupa)'가 불교가 전파되는 과정에서 '탑파'로 되고, 줄여서 '탑'이 된 것이다. 원래는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그 안에 모셔놓고 부처를 예배하듯이 하였으나, 불교가 널리 전파되면서 건립되는 모든 탑에 진신사리를 모실 수가 없으므로 후대에는 다른 사리나 불경, 작은 금동불 등 공경물이 될 수 있는 것들을 탑 안에 대신 모셨다. 그래서 절에 들어가면 부처를 모신 법당 앞에 있는 탑에 합장하여 예배하거나 탑돌이를 하며 기원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의 탑은 크게 재질에 따라 목탑, 석탑, 전탑으로 나뉜다. 그리고 탑의 이름은 대개 그 탑이 있거나 옮기기 전에 있던 자리, 층수, 재질에 따라 붙이게 된다. 말하자면 불국사 삼층석탑(석가탑)은 불국사에 있는 삼층으로 지은 돌로 된 탑이라는 뜻이다. 또 안동 신세동 칠층전탑은 절 이름은 모르고 지금 안동시 신세동에 있으며 벽돌을 쌓아 세운 칠층탑이라는 뜻이 된다. 지금 경북궁에 있는 경천사터 십층석탑은 본래 경기도 개풍군의 경천사터에 있던 것을 옮긴 것이므로 명칭이 그러하다. 또한 일반이 쉽게 탑의 층수를 알려면 지붕돌(옥개석)의 수를 세워보면 된다.
탑의 기원과 나라별 변천
우리나라에서는 '탑'이라고 하면 대개 불국사 석가탑처럼 돌을 다듬어 쌓은 삼층석탑을 떠올리지만, 세계 모든 탑이 재료나 모양에서 모두 그러하지는 않다. '탑'이라는 명칭이 불교의 전파 과정에서 지역어에 맞게 정착되었듯이 탑의 모양도 지역 특성에 따라 형성되었고 그래서 나라마다 특징도 다르다. 탑은 원래 인도 고유의 무덤 형식에 석가모니 사리를 모신 축조물에서 비롯되었다.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가 돌아가자(涅槃) 유해를 화장하여 여덟 나라에 나누어주고 탑을 세우게 하였으니 그것을 근본 팔탑이라고 한다.
지금 남아 있는 탑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인도 산치에 있는 거대한 탑으로 기원전 1세기에 기본 구조가 축조된 것이다. 반구를 엎은 모양인 무덤 자체에는 맨 위에 우산 같은 덮개처럼 산개(傘蓋)를 얹었을 뿐 다른 장식이 없으나, 둘레에 돌난간을 두르고 동서남북에 석가모니의 생애를 조각한 문을 세웠다. 그후 불교가 동쪽으로 전해질 때에 한길로는 비단길을 따라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의 북방을 통해 우리나라로 전파되었고, 다른 한길로는 인도 남부의 스리랑카에서 바닷길로 인도차이나 반도를 거치고 중국 남부를 통해서 전파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인도의 묘탑 형식이 고집되기보다는 각 지역의 고유한 건축물에 부처의 사리를 모시게 된 것이다. 중국에서는 원래의 다층누각이 초기의 탑이 되었고 뒤에 벽돌을 쌓아 구축한 전탑으로 자리 잡았다.
우리나라 탑의 연원과 형성 과정
중국을 통해 불교를 수용한 우리나라에서도 처음에는 다층누각 형식을 본받아 다층목탑을 지었다. 그 자리가 발굴된 것으로 평양의 금강사 팔각목탑자리와 경우 황룡사터 사각목탑자리, 부여 천군리 절터 목탑자리 등이 있다. 삼국시대에 가장 널리 지어졌고 통일신라시대와 고려 시대, 조선 시대에도 계속 지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전란이 나거나 했을 때에 불에 타기 쉬운 성질 때문에 거의 파괴되었고, 조선 후기에 지은 속리산 법주사의 팔상전과 김제 금산사의 미륵전만이 목탑 형식을 간직한 건축물로 남아 있다.
18세기에 지은 쌍봉사 대웅전은 특히 목탑의 고유한 기울기를 그대로 간직하여 삼층목탑의 전형적인 모습을 지녔는데 불에 타 버렸다. 지금은 그 자리에 복원되어 있어 원래의 고아한 맛을 지니지는 못하지만 목탑의 형식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목탑들을 겉에서는 삼층 또는 오층으로 보이나 내부는 높은 기둥으로 지탱하여 통층으로 뚫려 있다. 목탑의 그러한 제약을 깨닫고 좀 더 견고하고 불에 타지 않는 구축물로 고안된 것이 벽돌을 쌓아 세운 전탑이나 돌을 쌓아 세운 석탑이다. 나라마다 구하기 쉬운 재료를 이용하여 탑을 세웠는데, 중국에서는 풍부한 모래를 이용한 벽돌집이 이미 발달했던 터라 전탑을 많이 쌓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초기의 전탑을 찾을 수 없다. 또 벽돌 생산 자체도 손쉬운 일은 아니었던 듯하다. 대신 풍부한 석재를 벽돌 모양으로 잘라 쌓은 탑을 볼 수 있는데, 661년에 건립된 경주의 분황사탑이 그것이다. 원래는 오층 이상이었으나 지금은 삼층까지만 남아 있다. 분황사탑이 석재를 벽돌 크기로 자른 반면에, 돌 크기를 좀더 크게 하여 부재의 수효를 줄이고 모양을 단순하게 하여 쌓은 탑이 의성 탑리의 오층석탑이다. 이런 탑들은 몸돌에서 한 단계씩 점점 넓혀가며 쌓다가 가장 넓은 면에서 다시 한 단계씩 좁혀가며 쌓는 식으로 하여 옆에서 보면 한 층의 모양이 마름모꼴을 이룬다.
백제에서는 돌 자체의 성질을 살려 목탑의 부재를 돌로 대체하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전라북도의 익산의 미륵사탑은 7세기 초 무왕이 미륵사를 세울 때 가운데에 목탑을 세우고 동서로 석탑을 세웠는데, 그 중에 서쪽 탑 일부가 남은 것이다. 1층 기둥 모양의 돌에 목재를 다듬듯이 배흘림을 주었고, 기둥 위에도 목조 건축의 가구 수법을 그대로 적용하여 두공과 방(枋) 등을 두었으며, 넓은 판석을 다듬은 지붕돌의 처마 부분도 기와집의 지붕처럼 처마선이 살짝 들린 느낌을 주도록 석재를 깎았다. 원래는 구층탑이었으나 윗부분이 무너져 지금은 6층까지만 남아 있다. 이 석탑을 그대로 본따 동탑 잘에 새로 탑을 복원해 놓았다. 이처럼 목재를 석재로 대체하려면 돌을 나무처럼 깎아야 하므로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돌의 성질에 맞게 세부를 단순하게 해서 다듬게 되었으니 그렇게 만든 탑이 부여 정림사터에 있는 오층탑이다. 미륵사탑보다는 훨씬 간결해졌으나 1층 탑신에는 여전히 배흘림 수법이 남아 있고, 두공 위에 지붕이 얹힌 형식이나 얇은 판석으로 처마선의 느낌을 살린 점등에서 목조 건축의 느낌을 조금이라도 간직하고 있다. 전체적인 비례로는 땅에 발붙이기보다는 하늘을 향한 상승감이 더 강한 편이다.
탑의 이런 모양은 삼국 통일기에 매우 대담하게 정리되어 형식적인 통일성을 보인다. 삼국 통일을 이룬 문무왕이 동해를 바라보는 산중턱에 감은사를 세웠으나 끝을 보지 못한 채 죽자, 그 아들인 신문왕은 감은사 건립을 마무리하고 동남쪽을 향한 금당의 앞쪽 좌우로 의젓하고 둔중한 쌍탑을 세웠다. 681년에 완성된 이 감은사탑은 모든 목조적인 세부가 정리되어 단순해지면서 매우 강한 모습을 보인다. 감은사터 쌍탑과 비슷한 시기에 세워진 고선사터 삼층석탑이 7세기 중엽 삼국 통일의 기상과 힘을 표현한 반면, 100년 뒤에 축조된 불국사 석가탑은 전체를 받치는 기단부보다 몸돌과 지붕돌이 작아져 안정성이 강조됨으로써 신라문화 전성기인 8세기의 안정됨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9세기 이후에 세워진 탑들은 형식적으로 균형과 조화를 이룬 이 석가탑을 본따서 세워졌으므로 석가탑을 석탑의 전형 양식이라고 한다.
전형이 확립된 뒤의 탑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8세기 이후에는 신라의 수도인 경주 중심에서 문화가 지방으로 확산됨에 따라 경상남북도와 전라도, 충청도에까지 많을 절이 지어졌는데, 거기에 세워진 탑은 석가탑이 작아진 모습이다. 우리가 절에 가서 볼 수 있는 탑들이 대개 그러하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쌍탑을 세운 예도 많다. 감은사탑을 동서 쌍탑으로 세운 것에서부터 전남 장흥 보림사 대적광전 앞의 쌍탑, 근처에서 옮겨온 것이지만 경북 영주 부석사의 쌍탑 등이 그 보기이다.
우리나라 석탑의 구조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는 중국을 거쳐 삼국에 전해지면서,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의 신앙으로 자리 잡고 있다. 신앙의 대상으로는 불상과 탑이 있으며, 특히 탑은 인도에서 석가모니가 열반 후 석가모니의 유품과 사리를 보관하기 위하여 유래한 것으로,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여 예배하는 대상물이다. 경우에 따라 진신사리 대신 불경이나 작은 금동불 등 법물을 봉안하기도 한다. 재료에 따라 목탑, 석탑, 전탑 등으로 나누어지고, 특성상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석탑이 지금까지 가장 많이 전해오고 있다.
■석탑 부재
기단부 : 탑의 하부구조로 하중을 지반에 폭넓게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기단부는 1층이나 2층으로 마련하는데, 보통 1층으로 된 기단을 단층기단, 2층으로 된 기단을 이층기단이라 하며, 이때 아래층을 하층기단, 위층을 상층기단이라 한다.
지대석 : 기단부와 지면이 닿는 부분에 놓이는 석재로 탑을 세우는 기초이다. 보통의 경우 장대석이나 넓은 판석 등으로 하중 전달이 용이하도록 되어 있다.
탱 주 : 기단면석에서 우주 안쪽 면석부에 세워진 기둥으로 이 수량은 시대별로 특징을 보여 주고 있어 석탑의 건립시기를 구분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탱주는 탑의 몸체 부분 가운데에 도드라지게 새겨 지붕을 기둥처럼 받치는 형태로 목조건축에서 평주를 번안한 것으로 추정된다.
면 석 : 우주와 탱주 사이의 벽을 막아댄 넓은 돌로 여러장의 판석으로 되어있다. 그 위치에 따라 상층기단면석, 하층기단면석으로 구분한다.
갑 석 : 기단의 상면에 놓이는 넓은 석재로 여러 장의 판석을 활용하여 조립하는데 그 위치에 따라 상층기단갑석, 하층기단갑석으로 구분한다.
부 연 : 상층기단갑석의 밑부분에 만든 받침으로 주로 각형 1단을 활용하여 만들어진다. 간혹 낙수홈을 마련하여 빗물을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
탑신석 : 석탑의 몸체에 해당되는 부분으로 몸돌이라 한다. 각면 가장자리에 우주를 세운다.
옥개석 : 탑신석 상면에 놓이는 석재로 목조건축의 지붕에 해당한다
옥개받침 : 옥개석의 하면에 마련된 각형받침으로 목조건축의 공포에 해당된다. 옥개받침 수도 시대별로 특징을 보이고 있어 건립시기를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전 각 : 옥개석의 처마와 처마가 만나는 지점으로 시대별로 특징을 보이고 있다. 전각부의 처마가 치켜 올라간 정도를 반전이라 하는데 일반적으로 통일신라시대 석탑은 전각의 반전이 경쾌하고 날렵하며, 고려시대의 석탑은 둔중한 감을 주고 있다.
노 반 : 상륜의 맨 아래에 있는 반으로 이는 귀한 사람을 모실 때나 혹은 신성한 물건을 다룰 때 높이는 뜻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경의를 표하는 의미이다.
복 발 : 분묘의 형태로, 고대 인도의 둥근 모양인 하늘 모양을 불교 극락정토의 기원으로 보고 있다.
앙 화 : 신전이나 궁전을 의미한다. 이것은 부처나 보살이 앉는 연화좌로 귀한 자만을 모시는 자리로 표현되어 진 것이고 아울러 항상 깨끗함을 상징하는 것이다.
보 륜 : 인도에서 이상적인 전륜성왕을 불교와 연결시켜 불법을 전파시킬 수 있는 자, 최고 자리를 의미
보 개 : 구슬 같은 보석으로 장식된 천개를 말하며 최고의 신분을 의미한다.
수 연 : 불꽃모양을 한 것으로 공장들이 화재를 꺼리는 관습에서 유래한 것이다.
용 차 : 용은 곧 왕을 상징하며 최고의 자리를 의미한다.
보 주 : 더러운 것에 오염되지 않는 진다마니(振多摩尼)를 줄인 말로 여의주 또는 마니주라고도 한다.
우리나라 목탑의 구조
나무로 만든 탑으로, 중앙의 심주 초석에는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다. 현재까지 문헌과 발굴을 통하여 고구려 청앙리사지, 상오리사지, 백제의 군수리사지, 금강사지, 능산리사지, 미륵사지, 신라의 흥륜사지, 사천왕사지, 망덕사지, 황룡사지 등에서 목탑이 건립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 남아 있는 목탑은 조선시대에 세워진 법주사 팔상전이 유일하다.
목탑은 기단부-탑신부-상륜부로 구성되며 기단부는 석재를, 탑신부는 목재를, 상륜부는 청동이나 철재를 활용하여 건립된다. 일반사찰 목조건축과 세부구성에 있어서는 크게 차이가 없지만, 층수가 3층에서 9층까지 높다는 점과 평면을 정방형으로 구성하며, 건물 중앙 초석에 사리장치를 마련하여 부처님의 사리를 모심으로써 탑으로서의 상징성을 갖는다.
신라의 석탑의 특징
법흥왕 14년(527년)에 불교가 공인된 신라에서는 분황사 모전석탑(634년)을 비롯하여 통일 이후 감은사지 동서삼층석탑(682년), 고선사지 삼층석탑(7세기 후반) 등이 만들어졌다. 8세기에는 구황동 삼층석탑(8세기 전반)을 비롯하여 전대의 양식들이 불국사 삼층석탑을 통해 하나의 전형양식으로 완성되고, 또한 동시에 다보탑이라는 이형탑을 만들어 탑 조영의 절정을 맞이하였다. 이후 불국사 삼층석탑에서 다양하게 변화된 모습의 탑이 8세기와 9세기에 경주를 비롯한 각 지방으로 전파되었다.
■시원양식
신라는 삼국 중 가장 늦게 불교를 공인하였으나, 많은 수의 사찰이 건립되면서, 동시에 많은 탑이 건립되었다. 고구려, 백제와 같이 처음에는 목탑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이후 독자적인 양식으로 발전해나가기 시작했다. 현존하는 신라 최고(最古)의 탑은 선덕여왕 3년(634)에 건립된 분황사 모전석탑으로 기존의 목탑과 전탑에서 석탑으로의 변화를 시도하였다. 안삼암을 벽돌과 같이 다듬어 모전석탑이라 불리는데, 이를 통해 신라의 석탑이 목탑과 전탑의 양식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 의성군 탑리에 오층석탑을 건립하였다. 이 석탑은 전체를 화강암으로 조립하여 진정한 의미에서의 석탑의 건립이 시작되었다고 보여진다. 이상 이 두 탑들은 백제 양식과는 다른 양식을 보여주면서 이후 신라 석탑의 시원양식으로 구분되는 것이다.
1. 분황사 모전석탑, 신라 선덕여왕 3년(634), 높이 9.3m, 국보 30호
2. 의성 탑리 오층석탑, 신라(7세기 후반), 높이 9.6m, 국보 77호
■7세기 석탑(전형양식)
통일 직후 망덕사, 사천왕사에는 목탑이, 감은사에는 삼층석탑이 건립되었다. 또한 고선사지에도 삼층석탑이 건립되었지만 현재 목탑은 모두 그 터만 전해지고 있다. 감은사나 고선사지 삼층석탑은 시원양식의 석탑보다는 진일보했지만 아직 완성된 형식은 아니다. 목조건축의 번역을 충실히 따르고 있고, 부재의 조립에 있어서도 원시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은장사용). 그러나 이 시기의 탑은 2기에 불과하지만 이후 건립되는 신라 석탑의 기본양식으로 제시되었고, 결과적으로 이를 바탕으로 우리나라 석탑의 양식적 완성이 이루어졌다. 또한 석탑의 건립도 불교신앙의 숭배 뿐 아니라 감은사지 같이 호국적인 성격도 내포하고 있으며
이러한 건탑의 다양한 변화는 황복사지 삼층석탑과 같이 원탑(願塔)의 기능까지 추가됨을 알 수 있다. 가람배치에 있어서도 기존의 단탑가람에서 감은사와 같이 쌍탑의 가람으로 변화됨을 알 수 있다.
1. 감은사지 동서삼층석탑, 통일신라(682년), 높이 13.44m, 국보 112호
2. 고선사지 삼층석탑, 통일신라(7세기 후반), 높이 9m, 국보 38호
■8세기 석탑(전형양식)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는 경덕왕대(742~765)에 이르러 안정된 왕권과 정치제도를 바탕으로 문화적인 면 역시 황금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불교 문화 역시 융성기를 맞이하여 석굴암, 불국사를 비롯한 많은 건축물과 조형물을 건립함으로써 당시의 문화적 수준과 역량을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석탑에 있어서도 시원양식과 전형기를 거치면서 성립된 양식이 이때에 이르러 통일된 수법으로 정착되어, 이후 건립되는 모든 석탑의 근원적인 양식이 되고 있다.
건립된 석탑으로는 나원리 오층석탑, 구황동 삼층석탑, 장항리 오층석탑, 불국사 삼층석탑, 갈항사지 삼층석탑, 원원사지 삼층석탑 그리고 경주지방 외에 청도 봉기동 삼층석탑과 창녕 술정리 동삼층석탑 등이 있다. 이들은 대부분 불국사 삼층석탑의 양식을 모형으로 건립되었다. 이러한 석탑이 경주지방에 밀집되어 있는 이유는 통일된 석탑양식이 아직은 지방으로까지 파급되지 못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통일된 수법을 가장 대표하는 석탑이 불국사 삼층석탑이다. 부재의 단일화를 통해 규모는 축소되었으나, 목조건축의 양식을 완벽하게 재현하고 있고, 양식적인 면에서도 초기적인 양식을 벗어나 높은 완성도를 보이고 있다. 그 특징은 첫 번째, 이층기단으로 상하층기단부에 모두 2개의 탱주와 우주를 마련하고 있다. 또한 하층기단갑석의 상면에는 호각형 2단의 상층기단면석 받침이, 상층기단갑석의 상면에는 각형 2단의 1층탑신석 받침이 마련되었고, 하면에는 각형 1단의 부연이 마련되었다. 두 번째로 탑신석과 옥개석은 각각 1석으로 구성되었다. 또한 1층 탑신에 비해 23층 탑신이 낮게 만들어져 체감율에 있어 안정감을 주고 있다. 옥개석은 5단의 옥개받침과 각형 2단의 탑신받침을 가지고 있으며, 낙수면의 경사는 완만하고,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가 전각에 이르러 날렵한 반전을 보이고 있다. 세 번째 상륜부는 대부분 결실되어 노반석만 남아있다. 이 외에 장항리사지 오층석탑과 원원사지 오층석탑처럼 탑 표면에 장엄이 가해진 석탑도 만들어져 이후 9세기의 현상을 예고하고 있다.
석탑 이외에도 주로 안동지방에서 전탑이 건립되었다. 신세동 칠층전탑, 동부동 오층전탑, 조탑동 오층전탑을 비롯하여 송림사 오층전탑 등이 남아있다. 이 탑들은 대체로 단층기단이며, 1층탑신석에는 감실을 개설하고 있다. 옥개석의 상하면은 모두 층단을 이루고 있고,
특히 상면에는 기와시설을 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전탑들은 이후 화강암으로 번안되면서 모전석탑의 시원적인 양식이 되었다.
1. 나원리 오층석탑, 통일신라(8세기 초기), 높이 8.86m, 국보 39호
2. 구황동 삼층석탑, 통일신라(8세기 초기), 높이 7.3m, 국보 37호
3. 장항리사지 동서오층석탑, 통일신라(8세기 초기), 높이 9.1m, 국보 236호
4. 불국사 삼층석탑, 8세기 중기, 높이 8.2m, 국보 21호
5. 갈항사지 동서삼층석탑, 758년, 동탑 4.3m, 서탑 4m, 국보 99호
6. 청도 봉기도 삼층석탑, 8세기 중기, 높이 5.47m, 보물 113호
7. 경주 천군리 동서삼층석탑, 8세기, 동탑 6.37m, 서탑 7.72m, 보물 168호
8. 창녕 술정리 동삼층석탑, 8세기 중기, 높이 5.75m, 국보 34호
9. 원원사지 동서삼층석탑, 8세기 중기, 높이 5.75m, 국보 34호
10. 안동 신세동 칠층전탑, 8세기, 높이 17m, 국보 16호
11. 안동 동부동 오층전탑, 8세기, 높이 8.35m, 보물 56호
■9세기 석탑
일반적으로 9세기는 중앙귀족의 치열한 왕위쟁탈전, 호족세력의 난립으로 인하여 통일신라의 해체기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문화적인 면에 있어서는 지방세력이 대두되면서 중앙문화의 전국적인 확산과 새로운 양식과 유행에 의해 독창적인 예술 의욕이 더욱 활발히 발휘된 것으로 생각된다. 불국사 삼층석탑에서 확립된 양식이 계승발전 되면서 다양한 변화가 시도되었다. 먼저 하층기단에서는 탱주가 1주로 변하면서 이후 하층기단이 생략된 단층기단의 양식이 출현하기도 하며 안상과 비천상 등이 장엄 되기도 한다. 모전석탑의 경우에는 괴체형의 기단도 등장한다. 또한 상층기단 면석에서도 탱주가 1주로 감소하면서 각 면에 팔부신중, 안상, 사천왕, 보살이 장엄 되기도 한다. 또한 갑석의 받침도 다양하게 변화하며, 별석으로도 만들어졌다. 옥개석의 받침도 5단에서 4단, 3단으로 변화가 되며, 한 탑에서도 각각 다른 받침의 수가 나타나기도 한다. 탑신석은 1층 탑신석이 특히 높아지고 있다. 또한 사방불, 문비형, 보살이 주요 장엄으로 조각되고 있다. 전체적으로는 부재가 더욱 단일화되면서 그 높이가 많이 낮아진다. 이렇게 변화된 탑들은 경주지방 뿐만이 아니라 전국적인 확산을 통해 지방적인 다양한 요소가 가미되기도 하여, 이후 고려시대 석탑의 모태가 되었다.
1. 부석사 삼층석탑, 9세기 전기, 높이 5.2m, 보물 249호
2. 단속사지 동삼층석탑, 9세기 전기, 높이 5.3m, 보물 72호
3. 홍천 물건리 삼층석탑, 9세기 전기, 높이 4m, 보물 545호
4. 장연사지 동서삼층석탑, 9세기 전기, 동탑 4.6m, 서탑 4.84m, 보물 677호
5. 경주 남산리 서삼층석탑, 9세기 전기, 동탑 6m 서탑 5.1m, 보물 124호
6. 상주 화달리 삼층석탑, 9세기 후기, 높이 6.3m, 보물 117호
7. 경주 남산 용장계 탑상곡 삼층석탑, 9세기 중기, 높이 4.4m, 보물 186호
8. 문경 내화리 삼층석탑, 9세기 후기, 높이 4.3m, 보물 51호
9. 봉암사 삼층석탑, 9세기 후기, 높이 6.3m, 보물 169호
10. 보림사 남북삼층석탑, 870년(경문왕 10), 높이 5.4m, 국보 44호
11. 화엄사 동오층석탑, 9세기 후기, 높이 6.4m, 보물 132호
12. 실상사 동서삼층석탑, 9세기 후기, 각 8.4m, 보물 37호
13. 단양 향산리 삼층석탑, 9세기 후기, 높이 4m, 보물 405호
14. 영천 신월동 삼층석탑, 9세기 후기, 높이 4.6m, 보물 465호
15. 진전사지 삼층석탑, 9세기 후기, 높이 5m, 국보 122호
16. 선림원지 삼층석탑, 9세기 후기, 높이 5m, 보물 444호
■특수형 석탑
특수형 석탑은 일반형 석탑과는 달리 새로운 양식으로 건립된 석탑을 의미한다. 대표작은 바로 불국사 다보탑으로, 8세기의 일반헝 석탑의 완성과 함께 동시에 나타나 그 문화의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특수형 석탑은 갑자기 발생한 양식이 아니라 지속적인 문화의 발전 속에서 그 시원을 찾아야 할 것이다.
1. 불국사 다보탑, 8세기 중기, 높이 10.4m, 국보 20호
2.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 8세기 중기, 높이 5.5m, 국보 35호
3. 석굴암 삼층석탑, 8세기 중기, 높이 3m, 보물 911호
4. 정혜사지 십삽층석탑, 9세기 전기, 높이 5.9m, 국보 40호
5. 도피안사 삼층석탑, 865(경문왕 5), 높이 4.1m, 보물 233호
6. 연곡사 삼층석탑, 9세기 후기, 높이 6m, 보물 151호
7. 경주 남산리 동삼층석탑, 9세기 전기, 높이 7m, 보물 124호
8. 선산 죽장동 오층석탑, 9세기 전기, 높이 10m, 국보 130호
9. 선산 낙산동 삼층석탑, 9세기 전기, 높이 8m, 보물 469호
10.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 9세기 전기, 높이 5m, 국보 10호
11. 해인사 원당암 다층석탑, 9세기 후기, 높이 2.4m, 보물 518호
우리나라 고려시대의 탑 이해
고려의 태조는 송도(지금의 개성)에 도읍을 정하자, 만월대에 화려한 궁전을 짓고 법왕사 , 법륜사, 등 큰절을 10여 채나 세웠다. 그리고 그 후에도 많은 절이 전국에 걸쳐 세워 졌으나 고려 때 세워진 이 건축물들은 조선시대에 와서 불교를 탄압하는 정책 때문에 없어지고 불과 몇 채 만이 남아 있는 실정이다.
건축은 사원을 중심으로 한 불교 건축이 신라시대의 질서정연한 비례 감각을 잃고, 잡다하고 뒤섞인 집과 궁전 건립으로 기법이나 외관이 치졸해진다. 대표적인 목조 건물은 부석사의 무량수전 과 조사당, 수덕사의 대웅전, 성불사의 극락전등이 있다. 그 중 부석사 무량수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이다. 단순미와 지붕의 선이 이루는 느낌은 풍토적 이며 조용하고 평안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건축은 재료에 따라 목조건축과 석조건축으로 구분할 수 있고, 용도에 따라 불교적 건축과 비불교적 건축으로 대별할 수 있다. 그러나 목조건축 중에는 불사와 궁전같이 용도의 구별은 있으나 양식적으로는 동일하며, 석조건축은 석탑․부도 같은 불교적 건축 이외에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용도별 구분보다는 재료에 따른 분류가 가장 적절할 것이다.
고려시대의 목조건축은 13세기 이후에 건립된 10동 미만의 사찰건축이 남아 있을 뿐인 데 비해 석탑․부도 등의 석조건축은 상당수가 전하고 있다. 고려가 불교국가였던 만큼 국초부터 사원건립이 매우 왕성하였으며, 국도 개성(開城)에 남아 있는 유지(遺址)로 보아 모두 대규모의 건축이었으나, 목조건축물은 그 대부분이 소실되었고 오직 석조건축물만이 남아 있다. 건축부문에서 주목되는 점은 원의 건축양식의 영향이다. 고려 후기에 나타나는 다포계(多包系) 목조건물의 양식이나 경천사(敬天寺) 10층석탑 등은 모두 원의 영향 아래 나타난 것이다. 목조건축은 전기한 바와 같이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모두 13세기 이후에 건립된 것이며, 양식적으로 주심포계(柱心包系)와 다포계로 대별할 수 있다. 이 두 계통의 양식적 차이는 가구수법(架構手法)을 통해서 비교할 수 있으나, 다음 몇 가지로도 뚜렷이 구별된다. 즉,
① 공포(包) 배치에 있어 주심포집은 기둥 위에만 있고 다포집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형식이니, 주심포와 다포의 명칭은 바로 이 공포의 배치형식을 따른 명칭이다.
② 공포의 출목(出目) 수가 주심포집에서는 2출목에 그치고 다포집에서는 3출목 이상이다.
③ 주두(柱頭)와 소로(小)의 굽의 단면이 주심포 형식에서는 곡선이고, 굽 밑에 받침이 있으나 다포 형식에서는 직선이고 받침이 없다.
④ 첨차(遮) 끝의 모양은 주심포 형식에서는 복잡하나 다포 형식에서는 간단한 곡선이다.
⑤ 내부 천장은 주심포집에서는 기둥 위의 가구(架構)를 노출시키고 단청을 한 연등천장이지만, 다포집에서는 기둥 위를 막아서 그 위의 가구를 볼 수 없게 만든 우물천장이다.
이상과 같은 외관상의 차이만 보더라도 주심포집은 간결․명쾌하나 다포집은 화려․장중하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주심포계 집으로는 안동(安東) 봉정사(鳳停寺) 극락전(極樂殿), 영주 부석사(浮石寺) 무량수전(無量壽殿)과 조사당(祖師堂), 예산(禮山) 수덕사(修德寺) 대웅전(大雄殿), 영천(永川) 은해사(銀海寺) 거조암영산전(居祖庵靈山殿) 등이 있고, 다포계 집으로는 황주(黃州) 심원사(心源寺) 보광전(普光殿), 안변(安邊) 석왕사(釋王寺) 응진전(應眞殿) 등을 들 수 있다.
고려시대의 석조건축은 석탑과 부도가 질․양 양면에서 모두 고려시대 석조건축을 대표한다. 석탑은 기본적으로 전대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으나 부분적으로는 변화가 있는 한편 전대의 작품을 모방한 석탑이 나타난다. 전대의 석탑이 평면 사각형인 데 비해 다각형이 새로 등장하고, 재료에 있어서도 암청색의 점판암(粘板岩)을 사용하여 백색의 화강석과 대조를 이루게 된다. 고려시대 석탑에 나타난 새로운 양식을 보면
① 탑신부(塔身部)의 옥개석(屋蓋石)과 옥신석(屋身石)이 폭에 대한 높이의 비례가 커져서 전체적으로 고준(高峻)해지고,
② 옥신석 밑에 별석(別石)이 삽입되며,
③ 옥개석 받침의 층급 수가 적어지고,
④ 옥개석 처마 밑이 전각(轉角)에서 위로 들리며,
⑤ 옥신석 밑의 별석 또는 기단(基壇) 갑석(甲石)에 연화무늬가 조각되기도 한다.
이러한 변화는 11세기 초의 개심사(開心寺) 5층석탑이나 현화사(玄化寺) 7층석탑 등에 이미 나타나 있는 점으로 보아 아마도 건국 초부터 보이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된다. 전대의 작품을 모방한 예로는 화엄사(華嚴寺) 4사자3층석탑(四獅子三層石塔)에 대한 사자빈신사(獅子頻迅寺) 4사자9층석탑(四獅子九層石塔), 정림사지(定林寺址) 5층석탑에 대한 부여 장하리(扶餘長蝦里) 3층석탑, 미륵사지(彌勒寺址) 석탑에 대한 무량사(無量寺) 5층석탑, 의성 탑리(義城塔里) 5층석탑에 대한 빙산사지(氷山寺址) 5층석탑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모방작들은 다만 외형의 모방에 그쳤을 뿐 전체의 비례나 조각의 수법이 전대의 작풍을 따르지 못하고 형식화되었다.
http://kthkyj.com.ne.kr/images/korea01.jpg
http://kthkyj.com.ne.kr/images/korea28.jpg
다각탑(多角塔)으로는 금산사(金山寺) 6각석탑, 월정사(月精寺) 8각9층석탑, 영명사(永明寺) 8각석탑, 보현사(普賢寺) 8각석탑 등이 대표작인데, 이들은 모두 9층 이상의 다층탑이다. 어찌하여 고려시대에 다각탑이 출현하였는지는 해명하기 어려우나 다각탑의 분포가 지방으로 확산되어 있으며, 특히 평남에 많이 분포하고 있다. 한편 한국의 전형적인 석탑이나 다각탑과는 전혀 취향을 달리하는 탑으로 경천사(敬天寺) 10층석탑을 들 수 있다. 이 탑은 원의 공장(工匠)이 만든 탑인데다가, 건립 연대가 1348년이어서 여러 모로 보아 한국 석탑의 테두리 안에서 설명될 수 없으나, 그 모방작이 조선시대에 나타나고 있음은 주목된다.
끝으로 점판암제 석탑이 크게 유행하여 전기한 금산사(金山寺) 6각탑을 비롯하여, 해인사(海印寺) 원당암(願堂庵) 석탑, 영월무릉리(寧越武陵里) 석탑 등 각 지방에 상당수가 건립되어 있다. 또한 전탑(塼塔)과 모전탑(模塼塔)도 수는 많지 않지만 여전히 건립되었는데, 신륵사(神勒寺) 다층전탑(多層塼塔), 제천장락리(堤川長樂里) 7층전탑(七層塼塔) 등이 그 대표작이다. 그리고 중국의 영향으로 보이는 보협인탑(寶印塔) 1기(基)가 전하고 있음은 주목된다.
고려시대의 석탑이 대체로 전기에는 양식의 변화를 일으키면서 5층 이상의 거대한 탑들이 건립되었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형식화의 경향이 농후해지는 한편 신라시대와는 달리 국도 개성에서 서경(西京)인 평양(平壤)에 이르는 지역에 특히 많이 분포되어 있으며, 또 우수한 작품들이 전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석탑에 비하면 부도의 건립은 전대의 작례(作例)를 능가하는 많은 작품들을 남겼고, 형식의 다양함이나 표면의 장엄함과 화려함에 있어 월등한 발전을 보인 걸작품들이 많다. 먼저 형식은 전대의 부도가 8각원당형 일변도임에 비해 전대 형식의 계승은 물론, 그 외에 4각당형․석등형(石燈形)․석종형(石鐘形)․불탑형(佛塔形) 등 새로운 형식이 나타났고, 8각원당에 있어서도 부분적으로 새로운 의장이 가미되었다. 8각원당형은 기단․탑신․옥개로 구성하되 모두 8각을 기본으로 삼고 있는 점은 전대의 형식과 다를 바 없으나, 고달사 원종대사혜진탑(高達寺元宗大師慧眞塔)과 같이 기단 중대석이 커지면서 표면에 운룡(雲龍)을 입체적으로 조각하거나, 정토사 홍법국사실상탑(淨土寺弘法國師實相塔)과 같이 탑신이 구형(球形)이 되는 등 다양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4각당형은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에서 보는 바와 같이 평면 방형이며, 표면에 장식문양을 만조(滿彫)하였다. 석등형(石燈形)은 불국사(佛國寺) 부도 1기가 있을 뿐인데, 기단 중대석이 석등의 간석(竿石) 같이 높아지고, 탑신에는 사방에 감형(龕形)을 파고 불상을 조각하여 마치 화사석(火舍石)의 화창(火窓) 같은 느낌을 준다. 석종형(石鐘形)은 넓은 건축기단 중앙에 범종(梵鐘) 같은 형태의 탑신부를 안치한 형식으로, 탑신의 형태가 범종과 같은 데서 온 명칭이며, 신륵사 보제존자부도(神勒寺普濟尊者浮屠)가 대표작이다.
불탑형(佛塔形)은 전형적인 3층 석탑의 형태인데 외형으로는 불탑과 구별하기 어려우나, 이 형식을 취한 영전사 보제존자 사리탑(令傳寺普濟尊者舍利塔)에서는 명문(銘文)이 발견되어 보제존자의 부도임이 밝혀졌다. 이 밖에 또 하나 주목되는 형식으로는 진전사지(陳田寺址) 부도가 있다. 이는 석탑에서와 같은 기단 위에 8각의 탑신을 올려서 마치 8각 기단 위에 방형 탑신을 올린 도피안사(到彼岸寺) 3층 석탑과 통하는 착상이라고 하겠다. 8각원당형 부도에서는 표면이 장엄하고 매우 화려하니 이는 전대 이래의 형식이라고 하겠으나 고려시대에 와서는 더욱 정교(精巧)해졌다. 한편 사원의 건립에 따라 당탑(堂塔)과 함께 석등 또한 많이 건립되었는데, 형식에 있어 전대의 평면 8각형을 답습하는 한편 평면 방형의 새로운 형식이 창안되었고, 현화사석등(玄化寺石燈)과 같이 화사(火舍) 형식에서 화창(火窓)을 내는 대신 4우주(四隅柱)를 세우고, 옥구발산리석등(沃溝鉢山里石燈)과 같이 간석(竿石)은 운룡(雲龍)을 조각한 원주로, 또 고달사석등(高達寺石燈)과 같이 전대의 형식을 모방한 쌍사자(雙獅子)는 간석으로 대치하는 형식도 나타났다.
'산행&여행&테마'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짙은 봄바다 나들이... (0) | 2013.04.26 |
|---|---|
| 봄 나들이(2013년4월9일~4월12일) (0) | 2013.04.12 |
| 가을의 뒤안길(2012년11월9일~10일,충남 보령 오천항에서) (0) | 2012.11.11 |
| 소래포구에서의 한때(2012.10.15) (0) | 2012.10.16 |
| 제부도 갯펄 나들이(2012.09.21) (0) | 2012.09.22 |